글루미스토리

2024-06-02

프랑스대혁명 프랑스시민혁명에 대한 지식인들의 원인과 평가

프랑스 혁명사

프랑스 대혁명 프랑스시민혁명에 대한 역사가 지식인들의 평가와 필자의 평가 

프랑스혁명을 대표하는 그림중 하나인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외젠 들라크루아가 프랑스 7월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1830년에 그린 그림이다 

현재는 루브르미술관에 소장 되어 있다. 


하지만 그냥 프랑스혁명이라고 한다면 정말 다양한 프랑스혁명이 존재한다.

대부분 제일 먼저 1789년의 혁명을 떠올리는데 다른 프랑스혁명들과 구분하기 위해 프랑스대혁명이라고 칭한다.

대략적으로 프랑스대혁명은 1789년 7월14일서부터 1794년 7월28일의 프랑스시민혁명을 일컫기도 한다. 

1789년 전후로 프랑스는 정말 다양한 내부문제와 대외문제로 재정위기 상태에 있었으며 전비와 세금문제로 왕실, 귀족, 성직자, 부르주아, 일반백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갈등이 존재했다. 

이런 세금문제 때문에 삼부회가 소집되었고 테니스코트의 서약, 바스티유감옥습격, 프랑스인권선언, 프랑스혁명전쟁, 국민공회, 루이16세처형, 마리 앙투아네트처형등 다양한 혁명의 과정을 거쳐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에 이르러 테르미도르반동으로 인해 나폴레옹이 등장하고 나폴레옹의 쿠데타가 성공하면서 프랑스대혁명이 마무리되었다.  


아울러 쿠데타를 프랑스어로 coup d’État. 직역하면 국가에 대한 일격 또는 강타.

비합법적으로 무력이나 군사적수단을 통해 정권을 빼앗는걸을 일컫는데 프랑스어로 쿠데타를 쓰는 것이 흥미롭다. 그런 예가 프랑스에서 많았기 때문에 쿠데타라는 표현을 쓰는 것. 


아울러 여러 역사가와 지식인, 혁명사가들은 프랑스대혁명과 프랑스혁명에 대해 혁명의 원인과 평가들과 의의를 나타내고 있었는데 간략히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 쥴 미슐레

19세기의 프랑스 민족주의 역사가로 평가받는 쥴 미슐레는 프랑스혁명을 법치의 도래, 권리의 회복, 정의의 재생으로 정의했다. 혁명이 종교에 얽매여있던 중세를 탈피하는 기점이라고 생각한 듯한데 분명 구체제, 봉건사회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었던 중세기독교는 프랑스혁명의 구호였던 자유, 평등, 박애와는 거리가 있는 존재로 인식되고 있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분명히 전 유럽이 기독교적인 중세에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프랑스가 그 굴레를 벗어던지려 시도한 점이 분명히 프랑스혁명의 과정 중 하나이다. 기독교는 구체제, 전제체제와 동일시되고 타도의 대상, 혁명의 대상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2. 알렉시스 드 토크빌

프랑스혁명은 급작한 변화가 아니라 이미 변혁하고 있는 사회의 반대급부가 터진 것이고, 프랑스혁명의 원인을 1) 프랑스농민의 토지보유, 2) 영주통제(봉건체제)에서의 해방으로 보고 있다. 토지보유자가 된 농민들이 기존의 봉건잔재 - 장원부역, 도로통행세, 기구사용료, 토지매매세를 부담하는 것에 대한 반발과 토지를 소유하게 됨으로써 생기는 의식의 변화가 프랑스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본인의 재산을 침탈하는 귀족에 대한 반발심에서 시작된 혁명이 휘몰아치자 그동안 순응했던 봉건적질서가 몸서리치게 끔찍한 족쇄였음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3. 이폴리트 아돌프 떼느

프랑스혁명의 주요원인은 자유, 평등, 박애와 같은 형이상학적인 존재의 희망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양식과 양식의 소유, 가격, 분배의 문제, 즉 식(食)의 문제와 세금과 세금의 몫, 할당, 징수의 문제, 그리고 사유재산과 그 종류, 사유재산의 문제, 공적권리와 공적권리의 범위한계 등의 경제․사회문제로 파악했다. 그리하여 봉건적질서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부르주아와 농민들은 봉건적질서의 주요계급인 귀족을 제거하고 그로 인한 형벌과 반대급부를 벗어나기 위하여 중앙의 통제력을 제거하는데 폭력과 파괴를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고 보고 있다. 그 결과로 프랑스혁명이 정부의 통제력이 미미한 혼란속에서 피의 잔치를 열었다는 것이다.


4. 알퐁스 올라르

혁명전야에는 입헌군주정을 수립하려고 했던 프랑스가 급작스러운 혁명으로 선회한 원인으로 중산층과 결합한 농민의 회유실패로 들었다. 3신분의 의식변화에 대처하지 못하고 봉건적 구질서에 더욱 집착한 귀족과 성직자들에 대한 반대급부로 국민의회가 탄생하게 되고 귀족을 제거한 입헌군주정이 탄생하려는 찰나에 봉건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왕의 노선변화로 절대군주로서의 마지막 위엄을 발하려했으나 이미 왕의 권력은 국민의회의 힘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으로 떨어지고 있었고 3신분을 주축으로 한 국민회의는 이미 공화국으로 목표를 설정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왕과 귀족, 성직자의 고위계급이 제일 중요한 농민의 지지가 끊어지게 된 것이 제일 큰 요인이었다고 생각된다.


5. 알베르 마띠에

18세기 이르러 프랑스의 생산계층은 힘을 증대시켜 나가고 있었다. 절대왕정의 강화를 위해 왕은 귀족과 영주의 권한들을 빼앗고 있었고 기존의 권리들을 상실한 귀족과 영주들은 손해를 메우기 위해 농민들을 더욱 착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귀족들은 농민들의 증오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고 그런 구귀족에서 벗어나 새로이 탄생한 관직귀족은 왕을 견제함으로써 왕권을 약화시키고 구체제를 혐오하게 하는데 성공했다. 사법, 행정권을 독점하여 독립적 지위를 누리게 된 법복귀족과 그의 영향을 받은 부르주아들이 본인들의 계급적 이익을 의식하여 노동자계층과 농민들을 자극하고 영도함으로써 프랑스혁명전의 밑준비는 이미 끝나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왕권의 통치력이 약화되기 시작하고 억눌려있던 사회적불만들이 관직귀족으로 어느 정도 표출되고 그런 사회적불만들이 중산층과 농민들에게 이입되고 있었던 것이 마띠에가 말하는 프랑스혁명의 원인 중 하나라고 파악된다.


6. 루이 마들랭

구체제가 증오받기 시작하고 자유와 평등을 보전하려는 열망, 시민적 자유와 평등에 대한 열망과 프랑스인권선언에 천명된 원칙에 입각한 국가조직에 대한 열망으로 시작되었던 프랑스혁명은 기득권을 잡은 자코뱅파에 의해 변질되었다. 공포정치가 성립되고 그로 인한 반대급부를 철저히 피의 보복으로 탄압함으로서 혁명의 성격이 변질되기 시작하였고 그런 정부는 과두정으로서 새로운 독재를 시작하기 시작하였다. 국민들은 당시 유럽의 현황에 대해 비관적이었고 당시의 혁명정부를 자처하던 자코뱅파의 실정에 등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혁명정부는 기득권유지를 위해 기본적인 원칙을 수호하지 못했고 국민들은 국가적독립과 정부의 정상화, 국가이익보존, 그리고 혁명의 안정화를 위해 혼란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나폴레옹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방향을 잡지 못하고 휘둘리던 프랑스혁명이 어느정도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7. 조르쥬 르페브르

프랑스혁명의 궁극적인 원인을 부르주아의 탄생으로 보았다. 경제력을 비롯한 제능력을 보유하기 시작한 부르주아에게 능력부재로 인한 권위상실의 귀족과 성직자들이 최고신분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인정될 수 없는 모순적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이 프랑스혁명으로 나아가게 했지만 프랑스혁명은 다른 혁명들과 다르게 폭력적혁명으로 나아갔는데 그것은 사태를 통제해야 했던 중앙정부의 무능과 왕권을 견제하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인 귀족계급의 행동에서 찾을 수 있다. 왕권을 견제하는데에는 성공했으나 혁명 이후 재산손상과 지위와 특권에 대한 압력으로 자존심까지 타격을 입은 귀족세력은 혁명을 증오했고 그 과정에서 내전과 외국의 원조를 호소함으로써 격앙된 폭력사태와 공포정치로 결과가 나타났다.

즉 부르주아계층이 본인들의 자리찾기를 위하여 새로운 사회건설을 시도하려는 토대로 1789년의 프랑스혁명이 시작되었고 그 가운데 탄생된 프랑스인권선언의 실행을 위해 뒤이은 프랑스혁명은 여러 국면을 드러내고 있다고 보고 있다.


8. 조지 루데

1789년 앙시앙 레짐으로 표현되는 구체제가 붕괴하였고 법복귀족의 세속관직을 제외하고서는 귀족들의 모든 권한이 상실되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농민의 지위가 급속히 변화되기 시작하였는데 1/10세와 장원적 의무로부터 해방된 농민들은 권리의 획득 속에 의식자체가 변화되기 시작했다. 봉건적 제 잔재의 제거와 교역과 사업상의 장애물의 일소, 농민의 성장은 그 자체로 부르주아 사회의 성장을 촉진하고 자극하였다. 부르주아들이 성장하면서 가지고 있던 계몽주의로 인한 의식변화는 국왕의 독재를 종식시키고, 귀족의 특권을 타파하고 재산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 참정권이 주어지기를 바랬던 것이다.


9. 알베르 소부울

소부울은 사회주의의 관점으로 프랑스혁명을 바라보고 있다. 부르주아 집단은 1신분과의 타협으로 봉건질서를 개혁하려 했으나 귀족계급은 타협을 원하지 않았고, 그것을 중재했어야할 국왕은 중재력을 스스로 상실했다. 귀족계급의 권리회복시도에 농민들은 격렬하게 반응했고 부르주아계급에서는 사태를 주시하며 혁명과 전쟁 사이를 저울질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귀족계급의 위협은 계속되었고 혁명정부의 조직과 자코뱅당의 독재를 위해 중산층을 담당한 부르주아들은 상킬로트집단의 힘을 이용하게 된다. 그러나 상호모순이 있을수밖에 없는 부르주아와 상킬로트의 결합은 오래가지 못했고 후에 프롤레타리아의 전위대로 평가받는 상킬로트는 프랑스혁명의 무대에서 물러났다. 이런 계급대립적 투쟁의 변증법적진행이 프랑스혁명 내에도 산재해 있다는 시각으로 생각된다.


10. 알프레드 코번

대부분의 혁명사가들은 혁명의 정치적 대립에 주목해왔다. 그러나 그것이 정치적 대립이었는지 계급투쟁의 대립이었는지 명확히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속칭 부르주아와 농민들의 결합이 있었던 것으로 평가되는 것보다 부르주아 역시 귀족과의 계급투쟁, 농민 또한 3신분, 극빈층에서 벗어나기 위한 계급투쟁의 결과로 보는 시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프랑스혁명의 시작 속에서도 극빈층과 노동자들은 사회적으로 무시받고 있었고 그런 극빈층의 증가로 인한 불만의 누적이 프랑스혁명의 무자비한 진행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던 원인으로 보여진다.


11. R.R 파머

루소는 프랑스혁명의 중심적 이념, 즉 개개의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므로 자신들의 도덕적의지에 따르는 자유로운 행위에 의해 공동체와 법률을 만들어낸다고 하는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로베스피에르는 루소의 여러 특성들을 발전시켰는데 그런 인식들은 어느 정도의 부르주아들 사이에서는 공유되는 의식이기도 했다. 그런 의식들은 그 세기의 철학과 조화를 이루었고 미국의 독립전쟁에 의해 크게 강화되었다. 자유와 평등을 주장한 프랑스혁명은 극히 민주주의와 비슷할 것으로 생각되나 자유와 평등을 위주로 한 또 다른 독재는 반향을 불러왔다. 로베스피에르는 민주주의를 최종적인 정치형태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자유와 평등을 위한 대의정치의 전조 격으로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그 당시의 민주주의의 개념은 상당히 모호한 구석이 있어 이용하기에 따라 변화되었다.


12. 자크 고드쇼

견고했던 왕정들은 18세기 이르러 도전을 받게 되고 아메리카독립과 농민반란, 각종 소요들이 사회적 변화를 예고하였다. 프랑스혁명은 귀족의 저항과 더불어 시작되었고 상위계급의 투쟁으로 그치지 않고 모든 계층의 국민들에게 확산되어 더욱 격렬하고 폭력적인 혁명으로 진행되어 나갔다. 프랑스혁명은 프랑스의 구체제를 무너트리고 새로운 질서로 대체했을 뿐만 아니라 혁명의 물결을 다른 지역으로 전파, 확산시켰다. 그리하여 제네바, 폴란드, 벨기에, 아일랜드 등이 혁명의 영향을 받아 빈체제와 대항하였다. 프랑스혁명은 프랑스국내의 혁명으로 국한될 것이 아니라 세계적 혁명에 파급효과를 뿌리고 있었다.


13. 크레인 브린턴

프랑스혁명이 구체제를 파괴하고 기독교적 습성에서 가치이념이 자유와 평등으로 전도되었다. 평등은 육체적, 지적으로 동질적인 수평적관계가 아니라 구체제의 귀족과 성직자의 제 특권이 법률상으로나 사회적으로 더 이상 용인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기회의 자유와, 자신의 재능을 발전시키고 그 재능이 재화의 획득으로 나아가는 길에서의 방해도 용인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을 프랑스인들은 힘, 지능, 재산 등에 있어서 아무리 큰 차이가 있어서 공화국에서 프랑스인으로서 동일한 몫을 누리는 동등자들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혁명은 사상의 자유를 도래시키지는 않았다. 지성사적 관점에서 볼 경우 프랑스혁명의 참다운 의미는 승리를 구가한 부르주아로 하여금 계몽사상가들이 남겨준 이념에 적응해 가도록 하기 위해서 일련의 새로운 가치판단이 필요하게 되었다고 하는 점이다.

그리하여 변화하는 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자유, 평등, 박애의 구호가 프랑스혁명에서 이용되었다는 시각으로 보인다.


14. 내가 생각하는 프랑스혁명의 제 원인과 의의


위의 혁명사가들이 각기 다른 주장을 했지만 어느 정도 공통점이라고 지적할 수 있는 부분은 당시의 프랑스의 정치적상황이다. 프랑스의 절대왕정은 영국과의 전쟁, 미국독립전쟁과 특권층의 만성적인 면세특권으로 인한 재정적자를 기록하여 어려움을 겪고 조세 개혁을 추진하였으나 특권계급은 모든 개혁을 거부하고 전(前)혁명을 시도하였다는 것이다.

프랑스혁명의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이런 특권계급과 왕권과의 정쟁에서 비롯되었다.

그 다음의 부르주아의 개입과 민중과의 결합은 그 후의 일이다. 당시 특권계급과 왕권과의 적절한 타협이 있었다면 프랑스대혁명은 결코 발현할 수 없는 사건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토크빌이 말하는 것처럼 농민의 토지보유와 그에 따른 의식변화가 특권계층의 봉건적질서를 증오하고 부정하게 됨으로써 어느 전기에 프랑스혁명은 발현하였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특권계층은 그 어떤 타협도 거부하고 구체제를 유지하고 오히려 국왕과의 정쟁으로 특권을 늘리려 시도했으며 그 결과로 프랑스혁명을 공포와 피와 독재로 물들이게 된 것이다.


마띠에가 말했듯이 이미 특권계층은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혁명을 시작하고 있었다. 부르주아의 행동은 선행되었던 특권계층의 행동에 반사적이익과 교훈을 얻고 근대적요구와 새로운 기득권형성을 위해 민중층을 적절히 이용하면서 그것을 구조화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프랑스혁명의 원인은 당시의 경제, 사회, 정치등에서 다 찾을 수 있지만 인권선언에서 나타나는 ‘무지와 나태함 또는 인간 권리에 대한 경멸이 정부의 부패와 사회의 공적인 재난의 유일한 원인임을 믿고..’ 라는 전문에서 바로 찾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프랑스혁명이 현대에 만연한 근대적성향의 창작물들을 구체화하였고 최초의 코뮌을 설치하면서 사회주의를 실험해보고 자유, 평등, 박애로 대표되는 인권선언을 발표하였음에도 나폴레옹이 출현하고 왕정이 복고되고 제정으로 회귀하는 원인은 어디서 찾아야할까.


그것은 프랑스혁명이 창출한 국민과 국민국가, 국민군으로 나타나는 민족주의와 전체주의가 프랑스혁명의 밑바탕에 깔려있다고 생각된다. 레지스탕스와 개인주의로 표현되는 프랑스조차 1789년의 프랑스대혁명 이후에도 안정과 번영을 매개로 한 전체주의를 내재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자유와 평등의 개념 역시 시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다.

그 점은 미국혁명과 영국혁명과 달리 근현대의 중국의 문화대혁명과 유사점이 있어 흥미롭다. 무엇보다 ‘대중의 공포’라는 주제, 대중이 스스로 힘을 보여주지 않으면 이데올로기적 혁명은 불가능해지지만 그렇게 폭발한 대중의 힘을 누가 어떻게 제어하게 되는가.

평등과 자유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파괴와 회복의 상관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공포정치를 발현한 자의 죽음으로만 혼란의 끝을 맺을 수 있는가.

문화대혁명과 프랑스대혁명은 그런 시사점을 던져주었고 역시 공통된 제 원인은 민중과 무산층의 빈곤과 불만의 누적이라는 유사점이 있다.


그러나 프랑스혁명의 진정한 의의는 영국혁명과 미국혁명과 달리 프랑스혁명은 언제든 발현할 수 있는 국민의 사고와 정체성이라고 생각한다. 정부와 새로운 봉건적질서로 자리잡고있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에서 프랑스국민들은 프랑스혁명이 왜 일어났는지, 왜 중요한지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경우에만 국한시켜도 4.19혁명과 5.16쿠데타, 6월민주항쟁 등 근현대에 일어났다고 하지만 평가가 엇갈리고 비하되는 현실에서 프랑스국민들은 프랑스혁명을 통해 무엇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명확히 목표를 설정했다는데서, 대중의 단합과 위력을 바탕으로 한 저항의 무기를 손에 얻었다는 측면에서 의의를 두고 싶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