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 가문과 동북면 -고려말 동북면 여진족의 실태
1258년 12월 고려의 동북 변경지역인 和州(永興)에 원의 관부인 쌍성총관부가 설치되었으며, 이 관부의 설치로 고려는 동북면의 영토를 상실하였다. 쌍성총관부는 공민왕5년 7월 고려군에 의해 수복될 때까지 99년 간 존속하였다. 쌍성총관부의 관할 지역은 고려 정부의 통치력이 미치지 못하고 고려의 유이민과 여진인들이 섞여 살고 있던 곳이었다.
당시 원나라는 1350년대부터 황실 내부의 반목과 빈발한 내란으로 급속히 쇠퇴하기 시작하여 마지막 황제인 순제는 1368년 주원장이 이끄는 세력에게 수도를 내어주고 응창부로 도주하였다. 그로부터 북원시대가 시작되었고, 중원은 명의 통치 아래에 들어갔다. 원·명 교체기인 14세기 중엽부터 동북면의 대부분 지역은 실질적으로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않은 땅이 되었다. 원으로부터 만호·천호 등의 관직을 세습적으로 받았던 여진족의 추장들은 다수가 자발적으로 명나라나 조선에 빈번히 귀화하였다. 그러나 그 지역 전체가 어느 나라의 통치권에 귀속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압록강과 두만강 이남 지역이 공민왕대로부터 우리나라의 영역에 속하게 되었고, 요동반도 등의 요녕성 지역의 일부가 통치권 내에 들어가게 되었지만, 그 밖의 지역은 17세기초까지도 각국의 중앙 정부의 통치력이 확실히 미치지는 못하였다.
고려의 동북계·서북계에 가까이 살면서 고려의 농경생활을 익힌 여진은 흑수지역을 포함하여 만주의 내지에서 다른 여진들과는 구분되었던 것이 확실해 보인다. 고려에서는 이들을 동여진이라 칭하였다. 조선측의 일반적인 사료에서는 당시의 여진족을 여진과 오랑캐·우디캐로 삼구분 하고 있는 것이 확인된다. 여진은 일반적인 민족의 명칭으로 통칭되기도 하나, 오랑캐나 오도리와 구분되는 명칭으로 쓰여졌다.
고려시기 두만강 일대를 중심으로 한 남만주 지역과 한반도의 동북면 일대에 산거하고 있던 여진족의 분포상황은 그 사료의 부족으로 상세히 알 수 없으나 『태조 실록』, 『용비어천가』의 여진 관련 기록에서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고려말 두만강 유역의 넓은 지역에 산거하고 있었으며, 두만강 이남의 함흥에서 갑산, 북청 등 평야지대나 해안지대에 걸쳐 있었다.
이들 지역은 후일 조선의 개척에 의해 조선의 영내로 복속된다. 이렇게 자리잡고 있던 여진인들은 공민왕대 경제적·정치적으로 국가적 우대정책에 고무되어 고려의 영내에 정착 영주하는 사례가 속출하였다. 고려에서는 이들 여진인들을 받아들임에 있어서 관용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기도 하였다.
당시 쌍성총관부와 동녕부에 속해 있던 여진계가 귀화해오고 있었으며, 이들의 귀화는 고려가 존속하는 동안 계속되어, 조선시대까지도 나타난다. 고려에서는 귀화해 온 여진인들에게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원거주지에 그대로 살게 하면서 군사적 역할로 이용하고자 하였다.
여진 귀화인의 구성을 보면 유민·포로가 많고, 다음으로 만호·천호·백호와 추장으로서 수하들을 이끌고 귀화해 오는 자들이다. 특히 공민왕대 이후에는 고려 전기와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어 군사적인 활동을 하던 자들이 그 우두머리와 함께 귀화해 오는 경우가 많았다.
여진인 귀화 사례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은 1370년(공민왕 19년) 이성계가 동녕부를 수복할 때 얻은 1만여 호를 들 수 있다. 이 무렵 이성계의 활약으로 특히 동북면 지역에서 많은 여진 귀화인이 있었는데, 이들의 귀화로 고려의 북방은 더욱 확대되었으며, 이들은 귀화한 후 이성계 휘하의 사적 지휘체계 아래에 속하게 되었다. 귀화한 여진인들을 고려 후기 이성계의 군사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그가 중앙정계로 등장 할 수 있게 하는 군사적 기반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여진 추장들은 대략 10호에서 500여호에 이르기까지 그들에게 사적으로 예속된 가별초(家別抄)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고려에서는 이들 여진추장들에게 은전(恩典)을 베풀어 필요하면 관직을 내려, 관하인을 추장들에게 일임하여 관하인의 국역을 면제시켜 주었다.
이리하여 여진 추장들은 그 관하인을 노예처럼 사역하였다. 이와 같이 동북면 일대에는 고려말에서 조선 초기에 이르는 동안 대다수의 여진 추장들이 사적으로 가별초를 거느리고 있었으며, 이들 여진 추장들은 자신들이 고려로 귀화하면서 가별초를 함께 거느리고 왔다.
고려말 이성계가 군사활동을 통해 세력을 확장시키는 과정에서 수많은 여진인들이 포섭되었고, 그들이 소유하고 있던 가별초 집단은 이성계의 군사적 기반의 성장배경이 되었다.
-논문형 글이며 필자가 편집한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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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많이 영감을 얻고 참고한 자료는 윤은숙교수의 몽골제국의 만주지배사, 2010, 소나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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