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태조 실록』에서의 이성계 가문
대 | 이름 | 기술태도 | 관직 | 이동경로 |
20 | 이한 | 간략 | 신라 사공 | |
19 | 이자연 | 간략 | 신라 시중 | |
18 | 이천상 | 간략 | 신라 시중 | |
17 | 이광희 | 간략 | 신라 아간 | |
16 | 이입전 | 간략 | 고려 사도 | |
15 | 이염순 | 간략 | ||
14 | 이승삭 | 간략 | ||
13 | 이충경 | 간략 | ||
12 | 이경영 | 간략 | ||
11 | 이충민 | 간략 | ||
10 | 이화 | 간략 | ||
9 | 이진유 | 간략 | ||
8 | 이궁진 | 간략 | ||
7 | 이용부 | 간략 | 고려대장군 | |
6 | 이인 | 간략 | 고려 내시집주 | |
5 | 이양무 | 간략 | 고려 장군 | |
4 | 이안사(목조) | 상세 | 고려의주병마사 몽골 천호 겸 다루가치 몽골 흘찰 백호 | 전주-삼척-의주-이성-알동 |
3 | 이행리(익조) | 상세 | 부친세습 | 알동-적도-의주-안변 |
2 | 이춘(도조) | 상세 | 부친세습 | 안변-화주-함주 |
1 | 이자춘(환조) | 상세 | 부친세습 | |
- | 이성계(태조) | 상세 | 부친세습 |
위의 표는 『태조 실록』 제 1권 총서를 근거로 이성계 조상들의 계보를 정리한 것이다.
실록을 보면 5대조까지의 기술내용과 4대조부터의 기술 태도가 판이함을 확인 할 수 있다.
5대조인 이양무 때까지는 “이염순이 이승삭을 낳았다”는 식으로 간략히 처리된 반면, 이안사 때부터는 행적이 아주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공·시중·아간·사도·대장군 같은 벼슬을 한 집안이라면 가문의 역사가 어느 정도는 상세히 기록되는 것이 보통의 일이다.
또한 활동의 형태가 전혀 다르다.
『태조 실록』에서는 이씨를 “전주의 대성(大姓)이라고 했다.
그런 점에서 이성계 가문은 대토지 소유를 바탕으로 한 농경가문이어야 한다.
유목민이 전주의 대토지 소유자일 경우는 없으므로, 이양무때까지는 대토지를 소유한 가문이라고 봐야한다.
그것이 이안사 때부터 이성계 가문은 유목인을 연상시키는 집단이 되어 버렸다.
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동 횟수가 현저히 많아 졌으며 대토지를 소유한 대성의 가문이 왜 이렇게 이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해석이 없다.
또한 『태조 실록』에 따르면 이안사가 이동할 때마다 170여 가가 추종했다고 하는데 그 정도의 추종세력이었으면 대단한 세력가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 대규모 추종세력을 이끌고 다수의 이동횟수를 가질려면 농경을 한 대토지소유 가문이었다기보다는 유목민족에 가까운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실록처럼 관기로 인해서 벼슬아치와 마찰이 생겨서 이전하였다고 이해하여도 “목조가 석성(石城)을 쌓아 소와 말을 놓아 먹였다” 는 실록의 기록으로 미루어 명망을 떨치던 이성계 가문이 어느 순간 유목적 생활을 했는지에 대한 기술이 없다.
이런 점들을 볼 때 필자는 위의 계보에서 그나마 신빙성이 있는 것은 이안사 이후의 행적이라고 생각된다.
이성계 가문이 알려진 것이 이안사 때부터 이므로, 그 이후의 기록은 위조, 위증하지 못하고 그 이전기록을 위서했다고 판단된다.
이성계 가문이 머문 곳 중에서 유일한 한민족 거주지는 전주이다.
전주만을 유일한 거점으로 잡은 것은 이성계 가문이 본래 고려인이었다는 인상을 주기 위한 기술이라고 본다.
이안사의 행적은 이동하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아주 상세한데에 비해 전주에서의 기록은 그저 불가피하게 이전했다는 기술뿐이다.
더불어 당시 동북아 정세는 몽골침략기로서 동북면은 상당히 불안정한 지역이었다.
전주의 대성가문이 마찰이 있었다고 하여도 대규모 행렬을 이끌고 북상하였다는 것이 당시 정세로 봤을 때는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행적으로서 본래 이성계 가문이 동북면에 어느 정도 기반이 있지 않았더라면 선택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본다.
필자는 『태조 실록』이나 『용비어천가』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이성계의 여진족 조상들은 기술하지 않고, 처음으로 세상에 이름이 알려진 이안사가 본래 전주 출신이었다고 기술하는 방식으로 이성계 가문의 혈통을 감추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생각한다. 이안사 이후의 인물들은 전부 여진족 군장을 연상시키는 모습을 갖추었고, 조선왕조를 개창하면서 이러한 의문들을 전부 삭제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논문형 글이며 필자가 작성, 편집한글입니다
-사료비판 환영하며 정상적인 토론환영합니다
-참고한 논문, 참고자료들이 있으며 인용하였습니다 (인터넷글이라 주석달기가 어려워 요청시 오픈합니다)
-기타 문제점들도 말씀해주시면 참고하겠습니다
영감을 얻고 참고한 자료는 윤은숙교수의 몽골제국의 만주지배사, 2010, 소나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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