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루미스토리

2023-11-08

이성계가문의 동북면정착과정 -3

이성계 가문과 동북면

이성계의 선조가 동북면에 정착했던 시기는 원(元)이 고려를 침략하기 시작하던 무렵이다. 이성계의 고조부였던 이안사(李安社)가 어떠한 과정으로 동북면에 정착하게 되었으며, 그곳에서 어떠한 세력을 갖게 되었는가는 다음의 기록을 통해 살펴 볼 수 있다.
1) 목조(이안사)가 그 사실을 듣고 마침내 강릉도 삼척현으로 옮겨 거주하였다. 170여가의 백성들이 따라서 이주하였다. 예전 산성별감이 새로이 안찰사로 부임하려 하였다. 목조는 화가 미칠까 두려워 식속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동북면 덕원(德源)에 이르렀다. 170여호 백성 역시 목조를 따랐다. 많은 동북면 백성이 목조에게 복종하였다. 이에 고려 정부는 목조를 의주병마사로 삼아 고원에서 원나라 군사를 방어하도록 하였다. 이때 영흥 이북은 개원로에 속하니 원의 산길(散吉)대왕이 쌍성에 와서 진치고 철령 이북을 빼앗고자 하였다. 다시 원에서 사람을 보내 목조로 하여금 원에 항복하도록 하니, 목조가 부득이하게 금보노(金甫奴) 등 1,000여호를 이끌고 항복하였다. (『태조실록』1 총서)

2) 산길이 원제(元帝)에게 알리니, 원에서 알동천호소(斡東千戶所)를 세우고 이안사에게 금패를 내려주어 남경 등 다섯 천호소의 수천호(首千戶)로 삼고 달노화적(達魯花赤)을 겸하게 하였다. (『태조실록』1 총서, 고종 42년, 1255)
이성계의 고조부대에 이성계 가계는 전주에서 삼척을 경유하여 동북면의 의주로 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안사가 동북면으로 옮겨간 시기는 무인정권기로 元의 침입이 있었던 시기이다. 그런데 이안사가 의주로 갈 때까지 170여호에 달하는 사람들이 함께 따랐다고 하며, 의주에 이르렀을 때는 동북면에 거주하고 있었던 백성들도 이안사에게 의지하였다고 한다. 비록 혼란한 시기라고는 하지만 이안사가 화를 당할까 두려워 도주하는 마당에 170여호의 사람들이 이안사를 따라갔다는 것은 의문스럽기 그지없다.


이안사는 당시 동북면으로 가는 유이민집단 가운데 끼어 동북면 의주에 정착하게 되었거나 동북면에 의지할 세력이 있어 이동하였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그런데 동북면에 정착하게 된 이안사는 곧 세력자로 부상하였다. 원元이 동북면에 침입해 오자 고려 정부가 이안사를 의주병마사로 임명하였다는 기록을 통해서 그러하다. 이안사가 의주병마사에 임명되었던 것은 그의 세력이 원과 대항하는 데에 필요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고려 정부에서 이안사를 의주병마사로 임명하여 원에 대항하도록 한 것은 결국 이안사가 의주일대의 유이민집단을 배경으로 그 곳에서 세력을 쌓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당시 의주 일대는 유이민과 여진인이 혼합하여 거주하고 있었던 곳으로 고려 중앙 정부의 통치가 어려웠던 만큼, 이안사가 그곳의 세력자로 대두할 수 있었다고 보여진다. 또한 이안사의 무인(武人)으로서의 재능이 그가 성장할 수 있었던 요소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안사는 고려로부터 병마사라는 관직을 받고 원에 대항하려 했지만, 곧 원에 항복하였으며 그 대가로 원으로부터 천호직을 받기에 이르렀다. 원으로부터 천호직을 받은 이안사는 동북면일대가 쌍성총관부에 예속된 이후에도 계속 그의 세력을 인정받고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공민왕이 즉위하고, 원의 세력이 약해지면서 동북면 일대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으며, 이성계 가문 역시 이로 인해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때 환조(이자춘)가 쌍성 지역의 천호로서 왕을 와서 보았다..... 쌍성 등의 지역은 자못 비옥하여 동남 지방의 백성 가운데 재산이 없는 자가 많이 와서 살았다. 국가에서 중서성에 알리니 성지를 받아 관리를 파견하였으며, 요양성에서도 역시 관리를 파견하여 왔다. 공민왕도 행성낭중(行省郎中) 이수산(李壽山)을 보내 그들과 모여 새로온 백성과 그 전부터 있던 백성을 구별하여 등록하게 하고, 이것을 삼성조감호계(三省照勘戶計)라고 불렀다. 그 후에 잘 다스리지 못하여 백성들이 점점 유이하게 되었다. 왕이 환조에게 다스리게 하니, 백성들이 자기의 직업에 충실하게 되었다.   (『고려사』38 공민왕 4년 12월)

공민왕은 행성낭중 이수산을 쌍성총관부에 보내 예전의 백성과 새로운 백성을 구별하여 적(籍)에 올리도록 하였던 것이다. 여기의 신구(新舊)백성은 쌍성총관부 이전부터 그 지역에 거주하는 백성과 설치 이후 새로 옮겨온 백성을 구별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즉 쌍성총관부에 속한 지역을 고려가 회복하려는 전제에서 시행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쌍성총관부 일대의 백성들을 지배하고 위무하려는 의도는 실패하게 되고 백성들이 다시 옮겨다니게 되자, 공민왕은 이성계의 아버지인 이자춘으로 하여금 그 곳을 다스리게 하였다. 이것은 쌍성총관부의 기존 세력이었던 조휘(趙暉), 탁청(卓靑) 가문대신 이자춘을 그 곳 세력자로 고려 정부가 인정하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이자춘이 동북면 일대를 다스리게 되자, 백성들이 생업을 편안히 하게 되었다는 것은 백성들이 이자춘의 세력권에 편입되어 그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처럼 고려 정부로부터 지위를 인정받은 이자춘은 쌍성총관부가 고려에 수복된(공민왕 5년, 1356년) 이후에도 그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장작판감사(將作判監事)인 환조를 동북면병마사로 삼았다. 어사대에서 상소하기를 “이안사는 동북면인으로 또 그 지역 천호입니다. 병마사로 삼아 그 지역을 지키게 하는 것은 안 됩니다.” 라 하였다. 왕이 상소 내용을 허락하지 않았다. 환조가 북쪽에 도착한지 얼마 안되어 우리 나라 사람으로 여진 지역에 들어간 자들이 명령을 받들어 모두 돌아왔다고 보고하였다.
(『고려사』39 공민왕 10년 2월)


공민왕은 이자춘을 동북면병마사로 임명하였지만 반대가 있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자춘을 동북면병마사로 임명하여 동북면에서 그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였던 이유는 쉽게 파악되지 않는다.
다만 위 기록에서 여진인의 지역으로 들어갔다가 이자춘의 명령에 따라 돌아온 자들은 이자춘 개인 세력에 편입되었다고 판단된다. 고려에 편입되기보다는 이자춘 세력에 들어가 국역(國役)을 부담하지 않으려는 판단에서였을 것이다. 


-논문형 글이며 필자가 편집한글입니다
-사료비판 환영하며 정상적인 토론환영합니다
-참고한 논문, 참고자료들이 있으며 인용하였습니다 (인터넷글이라 주석달기가 어려워 요청시 오픈합니다)
-기타 문제점들도 말씀해주시면 참고하겠습니다
-8개단락으로 나누어 작성된글이므로 모든 글들을 종합하여 봐주시기 바랍니다 

가장 많이 영감을 얻고 참고한 자료는 윤은숙교수의 몽골제국의 만주지배사, 2010, 소나무입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