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가문과 동북면 북방민족 여진족에 대한 결론
마무리-
동북면 지역의 이성계 가문의 성장과 그가 중앙으로 등장할 수 있었던 시대적 배경, 그의 군사적 기반에 대해 특히 이성계 세력의 군사적 기반이 되었던 동북면 지역의 여진족이 차지하였던 역할을 살펴보았다.
그리하여 이성계 가문과 여진족과의 관계와 이성계가문이 세력을 구축하면서 본래 여진족계통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먼저 고려말 동북면 일대에 거주하고 있던 여진족들은 추장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었다.
이들은 원으로부터 만호·천호 등의 관직을 세습적으로 받았으며, 고려의 경제적 정치적으로 국가 우대정책에 고무되어 고려의 영내로 다수가 자발적으로 번번히 귀화하였다.
여진 추장들은 사병적 성격을 지닌 가별초 집단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그들이 고려로 귀화하는 과정에 함께 거느리고 귀화하였다. 고려에서는 귀화해온 여진족들을 백성으로 인정하고, 그들의 원래 거주지에 살게 하여 북방의 군사력으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고려말 이성계가 군사활동을 통해 그 세력을 확장시키는 과정에서 수많은 여진족들이 포섭되었고, 여진 추장들이 소유하고 있었던 가별초 집단은 이성계의 군사적 기반의 확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한편 이성계 가문은 이안사 대에 이르러 동북면 지역에 정착하게 된다.
이안사가 동북면에서의 가문의 기초를 이루게 된 것은 그 지역으로 이주한 이후에 다루가치라는 원의 관직을 획득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성계의 선조들은 동북면이라는 지역적 특수성을 바탕으로 고려 유이민 집단과 여진족을 결집하면서 점차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이안사와 이행리는 동북면 지역의 여진족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들을 규합하여 세력을 성장시키고 있었으며, 그 과정에서 여진 천호들의 견제를 받기도 하였다.
고려말 동북면 일대에는 부원세력과 여진 추장들이 포진하고 있었으며, 이성계 일가는 그들과 혼인을 통한 인척관계를 통해 점차 세력을 확장시켰다. 또한 동북면 일대가 원의 세력 아래 예속된 상황을 이용하여 점차 세력을 확장시켰고, 다시 고려에 의해 수복되는 공민왕 무렵을 전후하여 고려 정부로부터 그 지위를 인정받기에 이르게 되었다.
공민왕은 반원개혁정책을 실시하면서 쌍성총관부를 수복하였으며, 이 지역을 보다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토착세력을 이용하고자 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고려말 전국적인 외침은 새로운 군사력의 필요성을 증대시켰으며, 친원적 권문세족의 약화를 위해서는 새로운 세력이 절실한 시점이기도 하였다. 또한 고려말 많은 정치·외교적 변화가 나타나고 이러한 상황이 이성계 가문이 크게 주목받고 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
이성계 세력의 군사기반은 그의 선대로부터 이어받은 동북면지역의 유이민과 여진족으로 구성된 가별초 집단이 바탕이 되어 성립되었다. 그는 이를 토대로 공민왕 5년 중앙 관계로 진출하게 되었으며, 공민왕 10년 이자춘이 죽고 난 이후부터 활발한 군사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에 걸친 북방 지역의 전투 과정에서 동북면 여진인들을 적극 포섭하면서 자신의 세력을 확대시켜 나갔다. 이 과정에서 『태조 실록』등에 자주 언급되는 이지란, 이원경, 처명 등의 군사력은 물론 다른 여진 추장이 거느린 여러 군사력을 자신의 기반으로 삼아 나갔던 것이다. 특히 동북면 지역 여진족이 이성계의 세력기반이 되었던 것은 그의 군사활동이 주로 동북면과 서북면의 국경지대나 요동지역과 연관을 가지고 있었던 데서 알 수 있다.
이성계의 군사집단은 다른 장수의 군사들과는 달리 동북면 일대에서 나타나는 특수한 가별초 집단을 배경으로 하여 성립되었으며, 이들을 중심으로 강력한 군사력을 형성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군사력에 의하여 고려왕조를 붕괴시킬 수 있었으며, 그것은 그의 개인적 능력보다는 선조때부터 밀접한 관계를 맺어온 동북면 지역의 여진족이 그의 군사적인 기반이 되고 있으며, 변모하고 있던 국내외적 상황이 이를 도왔다고 생각된다.
이상과 같은 내용으로 고려말 이성계 가문의 성장과 그 군사적 기반을 살펴 보았다.
이러한 연구 속에서 필자는 이성계 가문과 여진족과의 관계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파악하고자 하였으나 이안사 이전의 이성계 가문의 기록과 이후의 기록, 그리고 신돈집권기에서의 이성계의 기록의 전무, 『태조 실록』과 『용비어천가』의 성격을 종합하여 보았을때 이성계 가문이 여진족 계통이었거나 이안사 전대부터 동북면으로 이동하여 유목생활을 이어나가다가 여말선초의 동북아시아 정세의 변화속에서 정치적·군사적으로 성장하여 조선왕조를 개창하였다고 생각된다.
조선왕조는 북방유목민족의 성격을 가진 여진족계통의 왕실과 고려말 신진사대부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다민족국가로서 건국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논문형 글이며 필자가 작성, 편집한글입니다
-사료비판 환영하며 정상적인 토론환영합니다
-참고한 논문, 참고자료들이 있으며 인용하였습니다 (인터넷글이라 주석달기가 어려워 요청시 오픈합니다)
-기타 문제점들도 말씀해주시면 참고하겠습니다
-8개단락으로 나누어 작성된글이므로 모든 글들을 종합하여 봐주시기 바랍니다
가장 많이 영감을 얻고 참고한 자료는 윤은숙교수의 몽골제국의 만주지배사, 2010, 소나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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