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과 이지란 그리고 동북면
우왕 14년(1388)에 단행된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은 조선건국으로 연결되는 도화선이 되었다.
이 사건으로 이성계는 일거에 정계의 실력자가 되었으며, 민망(民望)을 모으는 유력한 무장으로서, 개혁세력의 기대를 한 몸에 모으게 된다. 이지란이 이성계가 참여한 전투의 중요한 고비에서 든든한 무장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음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다. 이지란이 여진족에서 고려로 투항한 귀화인이니만큼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 위화도회군을 단행하는 과정에서 이지란은 어떠한 입장에 있었는지를 살피고자한다. 그럼으로써 이성계와 여진족의 관계를 조금 더 조명해볼 수 있을 것이다.
우왕 14년의 요동정벌은 두 가지 배경으로 촉발되었다.
명의 세공요구와 철령위설치문제이다.
특히 철령위설치문제는 당시의 고려 입장에서는 수용하기 어려운 조처였다.
공민왕 17년(1368)에 원의 정권은 중국에서 축출되고 주원장의 명왕조가 수립된 원명교체기에 공민왕은 반원친명정책을 사용하여 정식으로 명과 외교관계를 맺었다.(『고려사』권46 공민왕 18년 4월)
공민왕 사후 우왕이 즉위한 이후 고려와 명과의 외교관계는 순탄하게 전개되지 않았다.
우왕 원년(1374) 우왕은 사신을 명에 파견하여 전왕시호(前王諡號) 및 신왕승인(新王承認)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명나라 사신이 귀국 중 살해되면서 우왕의 사신은 입국을 거부당했다.
당시 실권자인 이인임(李仁任)은 원명 모두에게 사대(事大)를 취하는 이중 외교정책을 채택하였다.
원명 양국을 견제하면서 우왕의 왕위계승을 정당화 시켜 자신의 집권기반의 안정을 꾀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고려는 북원에 통교(通交)하여 우왕3년(1377) 북원으로부터 공민왕 시호(孝敬大王)와 신왕(禑王)의 책봉을 받았다.
우왕 11년(1385) 명은 우왕을 고려국왕으로 책봉하고 공민이라는 전왕시호를 승인하는 동시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그리하여 고려 양국 간의 정상적인 국교관계가 재개되었다. 그런데 우왕 12년(1386) 명에서 세공을 요구하면서 앙금이 맺히기 시작하였고 최영은 요동선공을 주장하였다.
우왕 13년 명은 나하추를 평정한 후 요동경영에 크게 관심을 가지는 동시에 고려에 대하여 더욱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철령위설치를 고려에 통보하였고, 고려에서는 탁청과 조휘의 배반으로 원에 귀속된 바 있지만 고려의 원래 영토임을 주장하면서 철령위설치의 부당성을 역설하였다.
고려의 외교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왕 14년, 명은 철령 이북, 이동, 이서의 땅은 원조에 소속하였던 땅이기 때문에 명에 귀속되어야 하며, 모두 요동에 귀속시킨다는 것이었다. 명이 원에서 쌍성총관부를 설치하였던 철령이북, 즉 동북면의 할양과 그곳의 거주민인 여진과 고려인 등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어 명은 강계지방에 경계표를 세우고 철령위설치를 시도하였고 고려정부에 그 사실이 보고되었다. 이로써 우왕은 최영과 더불어 명의 행동에 대응하여 전국에 동원령을 내리고 요동정벌의 결정을 표명하였다.
우왕과 최영의 요동정벌에 이성계가 사불가론(四不可論)을 제출하였지만 거부당했고 최영의 요동공격의 목적은 명의 고압적인 태도를 파쇄하고자 함이었다.
이성계가 주장한 사불가론의 내용은 이렇다.
첫째, 작은 나라인 고려가 큰 나라인 명과 대항하면 이길 수 없다는 이유로, 이것은 국가보전의 양책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둘째, 더운 여름에 군사행동은 불리하고 여름은 농경계절이므로 농민의 지대를 받기 어렵다는 내용이다. 또한 당시 고려의 전제문란(田制紊亂) 군량과 무기의 부족 등의 문제를 제기하였다.
셋째, 전국적으로 대군을 원정하면 왜구가 그 허함을 타서 침입한다는 근거였다. 왜구침입의 빈번함으로 요동으로 출병하면 반드시 왜구는 다시 침범할 것이라고 우려하였던 것이다.
넷째, 여름인 장마철에 병기를 쓰기 힘들고, 전투하기에 어렵고, 군대가 전염병에 감염되는 것등으로 병사들이 희생될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현실적으로는 신진사대부 계층의 이해와 직결된 제언으로 파악되고 있다.
우왕 14년 팔도도통사 최영, 좌군도통사 조민수, 우군도통사 이성계 등이 서경에서 진군하였으며 이지란이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예속된 우군은 이성계의 친병이 주력인 정예부대였다.
우왕 14년 5월 고려군은 압록강의 위화도에 도착하였는데 장마로 인하여 진군하지 못하고, 진중에 도망가는 병사가 많았다. 이로 인해 진중에 원성이 높아졌고 이성계는 조민수와 더불어 공격중지의 상소를 제출하였다.
우왕과 최영은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군을 독려하였고, 이성계는 진중에 회군론을 제시하였으나 조민수의 동의를 즉시 받지는 못하였다. 이에 고심하던 이성계는 이지란과 토의하게 되었고 이지란은 이성계의 정치적 상황을 고려하여 회군론을 지지하였다.
이지란은 이성계의 수하에 들어간 여타의 여진 추장과는 다른 인물이었다. 그는 이성계와 의형제 관계에 있었고, 공민왕 20년 고려로부터의 공식적인 귀화 이전에도 이성계와 긴밀한 연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지란은 자제(子弟)와 같은 고려가 부모와 같은 명을 공격하는 것은 배은행위(背恩行爲)로 회군하여 고려의 국가안전을 실현하자고 권유하였다.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회군을 결정하여, “명을 공격하는 것은 상국(上國)의 천자(天子)에게 죄를 범하는 것이므로 불가하다” 말하고 조민수, 이지란과 더불어 회군을 단행하였다. 그 후 이성계와 이지란이 개경에 도착하자, 이방우(李芳雨)와 이방과(李芳果), 그리고 이지란의 아들 이화상(李和尙) 등이 합류하였고 최영일파를 모두 숙청하였다.
이지란은 동북면 일대의 여진 및 가별초의 합류를 유도하면서 최영과 우왕의 세력보다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세운 공으로 위화도회군에서 일등공신이 되었다.
이성계 가문은 앞서 살펴보았듯이 동북면지역에 관할권을 가지고 있었고 이지란을 비롯한 토착 여진 세력들을 가별초집단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성계 가문은 누구보다 원명교체기의 격변하는 동아시아의 정치 상황을 알고 있었다.
1387년 나가추 항복 이후 1388년 토구스 테무르칸 북원정권의 궤멸소식과 몽골 지배계층의 도미노적 투항등 소멸해가는 북원의 실상은 이지란 등 여진세력에 의해 이성계에게 낱낱이 알려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이지란을 비롯한 귀화여진족과 기존 가별초집단을 기반을 계승하면서 위화도회군에도 동북면의 여진세력들이 조선건국에 일익을 담당해 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논문형 글이며 필자가 작성, 편집한글입니다
-사료비판 환영하며 정상적인 토론환영합니다
-참고한 논문, 참고자료들이 있으며 인용하였습니다 (인터넷글이라 주석달기가 어려워 요청시 오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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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개단락으로 나누어 작성된글이므로 모든 글들을 종합하여 봐주시기 바랍니다
영감을 얻고 참고한 자료는 윤은숙교수의 몽골제국의 만주지배사, 2010, 소나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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