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 가문과 동북면 그리고 가별초
대간에서 시무책을 올렸는데, 동북면의 함주 등지에 가별초라고 불리는 자들이 모여서 무리를 이루고 국역을 지지 않으며 별도가 가병(家兵)이 되어 사적으로 서로 결합하여 마음대로 하니 주현에서 통제하지 못한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태종실록 5, 태종 2년 12월 신해
비록 왕실 소속이라고는 하나 일반 백성을 가별초라고 부른다.
왕(태종)이 불가함을 알고 신묘년(태종 11년, 1411) 에 가별초를 혁파하여 관군으로 삼으니, 종실도 모두 감화되어 혁파하였다. 오직 도총제(都摠制) 이지영(李知英)은 이지란(李之蘭)의 자식으로 아직 혁파하지 않았다.
이 때에 이르러 왕이 그를 불러 말하기를, “동북면의 백성은 공역도 지고 사역도 지니 고통이 심하다. 비록 세전(世傳)이라고 하나 마땅하지 않다. 때문에 나도 환조 이전부터 내려온 가별초를 이미 혁파하였다. -『태종실록』6, 13년 8월 임자
위 기록에 의하면, 동북면 일대는 가별초라 불리우는 집단이 조선 태종 때에 이르기까지 존재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가별초집단은 국가에 역을 바치지 않았으며, 별도로 일정한 개인의 가병이 되어 활동하였던 것이다.
또한 이 가별초집단들이 주현의 통제에 따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가별초집단이 구성된 것은 이자춘 이전이었음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현실에서 공민왕이 이자춘을 동북면병마사로 인정한 것은 백성들을 이자춘의 세력 아래 편입시키는 것이 국가로 보아 더 유익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가별초집단과 아울러 고려정부로 인정받은 권위로 인해 이자춘은 동북면에서 가장 대표적인 가문으로 성장하게 되었으며, 그 세력이 이성계에게 전해지게 되었던 것이다.
앞서 동북면의 함주 등처의 양민 500가(家) 는 태조에게 예속되어 역을 졌다. 왕에 오르기 전에도 수령이 그들에게 역을 지우지 못했다. 그들을 가별초라고 불렀다. 『태종실록』21, 11년 6월 을사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기 이전에 동북면 함주 일대의 양민 500가를 자신의 세력 아래 예속시켜 국가의 통제를 받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성계가 거느렸던 가별초집단은 경제적 측면과 군사적인 측면을 아울러 가지고 있었다.
이자춘이 함주로 옮긴 이유가 목양(牧養)에 편했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가별초가 바로 이런 경제적인 생산 활동에 참여했던 것이다. 그것이 이성계대에 이르러서는 군사적 성격이 더욱 강해지게 되었는데, 그것은 이성계의 활발한 군사활동과 아울러 당시 동북면의 상황으로 말미암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동북면 일대의 일반 양인으로 구성된 가별초 집단의 군사적 비중을 강화하는 데 작용한 중요한 요인의 하나로 외적의 침입을 들 수 있다.
우왕 때에 요양과 번양의 초적 40여기가 단주를 침략해오니 이두란과 단주상만호(丹州上萬戶) 육려(陸麗), 청주상만호(淸州上萬戶) 황희석(黃希碩) 등이 서주위(西州衛)까지 추격하였다. -『고려사』116, 이두란전
왜가 또 단주를 침략하니 심덕부(沈德符)가 방어하였으나 패하였다. 또 왜가 단주, 홍원(洪原 ), 북청, 함흥 등지를 침략하여 백성들을 살육하고 노략질하였다. -『고려사』116 심덕부전
려말에 있어서 외적의 침입이 비단 동북면 일대에 국한되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위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동북면 일대는 왜와 초적들에게 빈번한 침략을 받았다. 공민왕대부터 홍건적을 비롯하여 우왕대에 더욱 극심하여 고려에 있어서 군의 강화는 절실한 과제였다. 그리하여 특수한 경우로 이성계는 고려정부로부터 비공식적으로 군사력강화를 위한 사병활동을 인정받았다고 할 수 있겠다.
-논문형 글이며 필자가 편집한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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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영감을 얻고 참고한 자료는 윤은숙교수의 몽골제국의 만주지배사, 2010, 소나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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